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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공연장의 분위기 : 19세기 클래식 관객의 세계
19세기 공연장의 관객은 단순한 '관람객'이 아니었다
오늘날 클래식 공연장에 들어서면, 관객들은 대부분 조용히 자리에 앉아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립니다.
공연 중에는 기침조차 삼가고, 연주가 끝난 후 조심스럽게 박수를 칩니다.
하지만 19세기 클래식 공연장의 분위기는 지금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오히려 그 시대의 관객은 공연의 일부처럼 행동했고, 공연장의 분위기는 마치 축제의 장과 같았습니다.
당시 관객들은 단순한 청중이 아니라, 공연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적극적인 참여자였습니다.
어떤 이는 특정 성악가가 무대에 등장하자마자 "브라보!"를 외쳤고, 어떤 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에서 고개를 저으며 야유를 보냈습니다.
실제로 작곡가나 연주자가 예기치 못한 반응에 당황하거나, 아예 공연이 중단되는 사례도 있었죠.
클래식 공연은 '사교의 장'이기도 했다
19세기 공연장은 오늘날의 조용한 ‘예술 감상 공간’이라기보다는, 사회적 만남의 장이자 사교의 무대였습니다.
오페라 극장은 귀족과 부르주아 계층이 자리를 차지하며, 공연만큼이나 누가 왔고, 어떤 옷을 입었는지, 누구와 동행했는지가 화제가 되곤 했습니다.
극장의 박스석은 사적인 공간처럼 활용되었고, 공연 중에도 옆 사람과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거나 간식을 먹는 모습이 흔했습니다.
무대 위에서 연주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관객들은 때론 무관심하게 잡담을 나누었고, 때론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무대에 투영했습니다.
관객의 반응이 공연의 성패를 좌우했다
19세기에는 언론의 평론보다 관객의 현장 반응이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한 공연이 성공작이 될지, 조기 폐막될지는 공연장 안의 분위기에 달려 있었죠.
박수가 터지면 작곡가의 이름은 순식간에 퍼졌고, 야유가 나오면 예술가의 경력은 위태로워졌습니다.
이렇듯 공연장에서의 반응은 곧 여론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작곡가와 연주자, 극장 기획자들은 관객의 취향을 면밀히 분석하고, 반응을 유도하기 위한 여러 장치를 고민했습니다.
이로 인해 다음 목차에서 살펴볼 '팬덤', '편 가르기', '박수 유도' 같은 흥미로운 현상이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죠.
2. 열광과 분열의 현장: 관객이 만든 편 가르기 문화
박수와 야유로 나뉜 두 진영, 관객은 언제나 편을 들었다
19세기 클래식 공연장의 관객은 단순히 음악을 감상하는 청중이 아니라, 자신이 지지하는 작곡가나 성악가에게 열렬히 반응하는 팬덤의 일부였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응원단’이 공연장을 점령하고 있었던 셈이죠.
특정 성악가가 등장하면 일부 관객은 박수와 환호를 보내며 열광했고, 반면 다른 진영에서는 의도적으로 침묵하거나 심지어 야유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공연 내내 이어졌고, 극단적으로는 하나의 아리아를 두고 두 편이 공연 중에 서로 싸우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유명 작곡가 팬덤의 갈등 사례: 벨리니 vs 도니제티
가장 잘 알려진 사례 중 하나는 1830년대 파리와 밀라노에서 벌어진 벨리니와 도니제티의 팬덤 대립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뛰어난 오페라 작곡가였지만, 스타일이 다르고 지지 계층이 나뉘어 있었습니다.
벨리니 팬들은 그가 창조한 서정적이고 섬세한 멜로디를 찬양했고, 도니제티의 팬들은 그 반대로 극적인 전개와 강렬한 감정을 더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취향의 차이를 넘어서 극장 내에서 조직적으로 편을 갈라 관객 반응을 통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박수와 야유가 뒤섞인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죠.
오페라는 음악이 아니라 ‘정치’였다
19세기 유럽은 정치적 격변의 시기였고, 클래식 공연장은 그 자체로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메시지가 충돌하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오페라 공연에서는 민족주의, 자유주의, 왕정 지지층 등 다양한 정치적 입장이 관객 반응에 반영되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베르디의 오페라는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지지하는 상징으로 사용되었고, 그의 팬들은 단순히 음악이 좋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박수를 보냈습니다.
반면 반대 진영은 같은 장면에서 야유를 보내며 공개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출했죠.
공연이 끝난 뒤에도 계속되는 ‘전쟁’
그 시절 공연은 무대 위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에는 신문 평론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졌고, 작곡가 지지자들은 편지를 보내거나 팜플렛을 제작해 자신의 입장을 알리려 했습니다.
어떤 경우엔 특정 작곡가를 비난하는 익명 비평문이 돌아다니며, 대중 여론을 조작하려는 시도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19세기 공연장은 열광과 분열, 예술과 정체성, 음악과 권력이 충돌하는 현장이었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관객’이 있었습니다.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공연을 움직이는 힘 그 자체였던 것이죠.
3. 호응도 연출된다: ‘박수 유도’와 박수부대의 등장
“브라보!”도 누군가의 기획이었다
19세기 클래식 공연장에서 터져 나오는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 “브라보!”라는 외침은 단순한 감탄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경우, 그것은 철저히 계획되고 연출된 호응이었습니다.
당시 유럽 오페라계에는 **‘클라쿠어(claqueur)’**라는, 돈을 받고 박수를 치는 전문 관객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공연의 흐름에 맞춰 특정 장면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연출하고, 가수의 아리아가 끝나는 순간 박수를 유도하며 공연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했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방송 관객처럼 말이죠.
이런 박수부대는 오페라하우스와 계약을 맺거나, 작곡가 개인이 직접 고용하기도 했습니다.
그 수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에 달하기도 했고, 호응의 정도에 따라 수당이 달라졌습니다.
마이어베어와 박수 연출의 정교한 시스템
프랑스 오페라계의 중심에 있었던 **자코모 마이어베어(Giacomo Meyerbeer)**는 박수 유도를 마치 작곡의 일부처럼 다뤘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오페라 《위그노 교도(Huguenots)》와 《예언자(Le Prophète)》는 대규모 합창과 극적인 전개가 특징인데, 마이어베어는 이 장면들이 끝나는 순간 클라쿠어들이 일제히 박수를 유도할 수 있도록 구조를 설계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극장 내부에 박수부대를 위한 좌석을 따로 배치하고, 어떤 장면에서 몇 명이 반응해야 하는지를 지시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호응을 넘어서, 관객 전체의 감정 흐름을 조정하는 전략이었죠.
베를리오즈의 냉소와 박수부대 비판
한편,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는 이런 문화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평론에서 클라쿠어를 "돈 받고 감탄하는 영혼 없는 기계들"이라고 표현하며, 진정한 예술의 감동을 왜곡하는 상업적 장치라고 혹평했죠.
베를리오즈의 대표작 《환상 교향곡》이 초연되었을 때, 그는 일부 박수부대를 사전에 배제하려 애썼지만, 공연의 반응은 엇갈렸고, 오히려 박수부대 없이 얻은 냉담한 반응에 괴로워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박수부대는 예술가에게 유리한 도구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예술의 순수성을 해치는 요소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작품도, 연출도, 반응도 모두 '설계'되던 시대
마이어베어뿐 아니라 로시니, 도니제티, 베르디 같은 오페라 작곡가들도 이런 관객 반응의 흐름을 매우 신중하게 설계했습니다.
예를 들어, 베르디의 《나부코》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Va, pensiero)’는 애초부터 눈물과 환호를 동시에 자아내도록 작곡되었고, 실제로 이 장면은 공연장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순수한 감동이었는지, 박수부대의 효과였는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관객의 감정은 이미 ‘공연의 일부’가 되어 있었던 시대였던 셈입니다.
4. 작곡가와 공연 기획자의 생존 전략
오페라는 예술이자 사업이었다
19세기의 오페라 극장은 단순히 예술을 선보이는 공간이 아니라, 철저히 수익성과 경쟁이 존재하는 상업적 무대였습니다. 공연이 성공하려면 단순히 좋은 음악을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작곡가와 기획자 모두 관객의 입맛, 정치적 분위기, 언론 평판, 스타 성악가의 캐스팅까지 고려한 복합적인 전략을 짜야했죠.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작곡가들은 마치 오늘날의 프로듀서처럼 움직였고, 공연 기획자들은 공연장을 운영하면서 수익과 명성, 정치적 영향력을 모두 챙기는 치밀한 경영자 역할을 했습니다.
공연 기획자는 흥행의 설계자
19세기 유럽, 특히 **파리 오페라극장(Opéra de Paris)**이나 라 스칼라(La Scala) 같은 대형 극장은 **‘극장장(intendant)’**이라는 직책 아래 운영되었고, 이들은 오늘날의 PD 겸 CEO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연간 공연 계획을 짜고, 작곡가를 섭외하며, 성악가와 무대 디자이너, 오케스트라 지휘자까지 일일이 결정했습니다.
극장장은 종종 정치적인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의 오페라 극장장 듀플랑(Duplantier)**는 정부와 연결돼 있었고, 작품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여론을 조율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획자는 단순한 관리자라기보다 문화와 권력을 잇는 인물이기도 했던 것이죠.
이런 기획자들은 작품 선택에 있어서 흥행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저울질했습니다.
유명한 성악가를 주연으로 기용하는 것이 흥행에는 유리했지만, 작곡가의 의도를 훼손할 수도 있었고, 지나치게 대중적인 내용은 평론가의 혹평을 받을 위험도 있었기 때문이죠.
작곡가들의 '공연 맞춤형' 전략
작곡가들도 이런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극장과 관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작품을 ‘맞춤형’으로 설계했습니다.
예를 들어, 도니제티는 어떤 오페라는 성악가의 기교를 극대화해 스타 가수를 부각했고, 다른 오페라에서는 정치적인 메시지를 숨겨 넣어 민중의 지지를 얻기도 했습니다.
**베르디(Giuseppe Verdi)**는 대표적인 전략가였습니다.
그는 《리골레토》와 《일 트로바토레》 같은 작품에서 강렬한 감정, 기억에 남는 아리아, 드라마틱한 전개를 결합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동시에, 극장의 요구사항도 충족하는 교묘한 균형을 보여주었죠.
심지어 그는 각 지역 공연마다 약간씩 오케스트레이션을 바꾸거나 대본 수정을 허용하기도 했습니다.
관객의 반응을 예상해 박수 타이밍까지 계산한 작곡 방식은, 지금 보면 마치 영화 예고편을 미리 편집하는 홍보 기획자의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생존을 위한 음악가의 다중 역할
작곡가는 단지 음악만 쓰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연출가, 마케터, 편집자, 외교가로서 활동해야 했습니다.
공연이 실패하면 후속 의뢰가 끊기고, 비평가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며, 경제적으로도 곤란해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리하르트 바그너(Wagner)**는 자신의 오페라를 실현하기 위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직접 기획하고 자금을 유치하며, 무대 기술까지 통제했습니다.
그는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기획자, 건축가, 작가, 지휘자까지 도맡았고, 이는 그가 단지 작곡가 그 이상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죠.
공연장의 운명은 ‘리허설 전’에 결정됐다
이 모든 전략은 사실상 공연 전에 이미 게임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성악가를 쓸 것인지, 어느 극장에서 공연할 것인지, 어떤 장면에 박수 유도를 넣을 것인지, 평론가에게는 어떤 메시지를 흘릴 것인지...
19세기 공연 문화는 단순히 ‘작품을 올리는 일’이 아니라, 정교하게 설계된 문화산업의 최전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항상 작곡가와 공연 기획자의 생존을 위한 전략이 자리 잡고 있었죠.
5. 클래식 공연은 어떻게 조용해졌을까?
고요한 객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오늘날 클래식 공연장에서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풍경—정숙한 객석, 연주가 끝난 뒤에만 터지는 박수, 연주 중 침묵을 지키는 태도—는 사실 19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낯선 모습이었습니다.
오히려 18~19세기 초반의 공연장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음악을 배경 삼아 대화하거나 식사를 하기도 하고, 공연 중간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것이 일상이었죠.
작품의 특정 부분에서만 손뼉 치고, 연주 도중 환호를 보내는 것도 자연스러운 문화였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 분위기가 바뀐 걸까요? 이 변화에는 음악에 대한 인식의 전환, 그리고 이를 이끈 음악가들과 공연 스타일의 변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멘델스존과 ‘존중받는 음악’의 시작
클래식 공연 문화에서 ‘정숙함’이 미덕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첫 흐름은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1829년, 잊혔던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베를린에서 부활시킨 공연을 통해 음악 그 자체를 경건하게 감상하는 태도를 유도했습니다.
이 공연은 단순한 오락이 아닌 종교적 감동과 예술적 체험으로 여겨졌고, 관객들은 무대 앞에서 조용히 몰입하는 새로운 감상 문화를 경험하게 되었죠.
멘델스존은 자신이 지휘하는 연주회에서 리허설을 철저히 관리하고, 연주 전 프로그램 해설을 배포하며, 관객의 감상을 진지하게 만드는 장치를 도입했습니다.
이는 훗날 예술 음악의 진중함을 요구하는 문화로 이어지며, 공연장에서의 침묵이 ‘예절’이자 ‘예술에 대한 존중’으로 받아들여지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바그너, 침묵을 요구한 작곡가
멘델스존의 노력이 클래식 감상의 격을 높였다면,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는 아예 공연 전체를 몰입의 공간으로 설계한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독일 바이로이트에 전용 오페라 극장을 지었고, 그곳에서는 관객의 일체의 소음과 방해를 금지했습니다.
바그너의 작품은 연속적인 음악 흐름을 갖고 있어 중간에 박수를 치거나 끼어드는 것이 구조상 불가능했고, 극장의 조명도 어둡게 설계하여 관객이 무대에만 집중하도록 유도했습니다.
《니벨룽의 반지》 전곡 공연에서는 공연 시간만 총 15시간에 이르렀지만, 관객은 음악과 서사에 완전히 몰입하도록 요구받았습니다.
그는 감상을 ‘참여가 아닌 몰입’으로 정의했으며, 이러한 철학은 현대 클래식 공연의 침묵 규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말러의 교향곡과 정적의 미학
20세기로 접어들며 등장한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음악도 고요한 감상의 문화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교향곡은 극적인 절정과 함께 정적인 순간, 미묘하고 내밀한 표현이 강조되었기에, 관객의 사소한 기침 소리조차 방해가 되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말러는 자신의 작품을 연주할 때, 연주자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정적에 대한 예민함과 존중을 요구했습니다.
교향곡 9번의 마지막 악장은 거의 속삭이는 듯한 연주로 끝나기 때문에, 청중은 숨죽이며 기다리고, 곡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박수가 터지지 않는 경건한 분위기가 연출되었습니다.
이러한 연주 경험은 관객으로 하여금 음악과 자신의 감정 사이에 더욱 깊은 연결을 느끼게 만들었고, 점차 클래식 감상의 기본 태도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음악을 ‘듣는 것’에서 ‘경험하는 것’으로
멘델스존, 바그너, 말러 등의 노력과 작품은 클래식 공연장을 단순한 오락 공간이 아닌, ‘예술의 성소’로 변화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감상 태도도 점차 변했고, ‘조용히 듣는 것’은 매너이자 작품에 대한 예의, 나아가 예술을 대하는 하나의 철학으로 정착했습니다.
결국 클래식 공연이 조용해진 것은 단순한 사회적 예절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작곡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몰입해 주길 바라는 간절한 요청에서 비롯된 결과였습니다.
6. 클래식의 공연 현장 반응
감상은 고정되지 않았다: 매 공연이 다르게 살아 숨 쉬었다
오늘날 클래식 공연은 일정한 규범 아래 정제되어 진행되지만, 19세기 공연은 그때그때 달랐습니다.
동일한 곡을 같은 지휘자가 연주해도, 관객의 반응이나 연주자의 기분, 날씨, 공간의 울림 등 수많은 요소에 따라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흘러갔죠.
이 시기의 무대는 마치 오늘날의 록 콘서트처럼 감정의 파동과 즉흥적인 반응으로 가득 찬, 살아 있는 현장이었습니다.
곡은 악보대로 연주되지만, 공연은 악보를 넘어선 차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박수, 야유, 환호가 뒤섞인 뜨거운 무대
당시 공연장에서 관객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인 감정 표현자였죠. 어떤 아리아에서는 열광적인 환호가 반복을 유도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에서는 거침없는 야유와 조롱이 날아들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로시니의 오페라입니다. 《세비야의 이발사》 초연 당시 관객들은 등장인물의 연기나 무대 사고에 반응하며 웃음을 터뜨리고, 중간에 대사를 따라 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관객이 연극을 ‘리액션 콘텐츠’처럼 소비하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리스트(Franz Liszt)**의 피아노 연주회는 거의 아이돌 콘서트를 방불케 했습니다.
관객들은 리스트가 연주를 멈출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 치고, 때로는 손수건을 무대로 던지거나, 소유하고 있던 악보나 연필까지 던지며 즉각적인 흥분과 감탄을 몸으로 표현했습니다.
연주자는 무대를 넘어서 관객과 호흡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연주자들은 단지 소리를 전달하는 이가 아닌, 현장의 에너지를 받아 반응하는 배우이자 퍼포머였습니다.
관객의 반응이 격렬할수록, 연주자도 그에 맞춰 템포를 조정하거나, 즉흥적으로 장식을 추가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는 연주의 순간마다 관객의 분위기를 읽고 한 악장을 늘리거나 단축시키기도 하고, 무대 위에서 쇼맨십을 발휘하며 ‘악마와 거래한 남자’라는 이미지를 극대화했습니다.
이처럼 무대는 연주자 혼자 만드는 공간이 아니라, 관객과 함께 완성하는 공연의 장이었던 것이죠.
예측 불가능한 무대, 그것이 바로 공연의 본질
공연이 끝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기술적 실수나 무대 사고도 있었고, 관객의 지나친 반응으로 공연이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불확실성과 즉흥성 덕분에, 공연장은 언제나 살아 있었습니다.
말러는 이런 현장성을 오히려 예술의 일부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는 교향곡 연주에서 청중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연출’을 고려하기도 했고, 지휘자로서도 실시간으로 해석을 바꾸며 그날그날 다른 ‘감정의 서사’를 이끌어냈습니다.
이런 경험은 음반이나 녹음으로는 절대 재현되지 않는, 현장만이 줄 수 있는 예술적 긴장감이었습니다.
클래식 공연, ‘과거의 박제’가 아닌 ‘지금의 경험’
많은 이들이 클래식 공연을 정적이고 보수적인 것으로 오해하지만, 본래의 무대는 언제나 **감정이 폭발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드라마의 현장’**이었습니다.
오늘날 공연장에서의 정숙함도 중요한 미덕이지만, 그 안에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긴장감, 해석의 변주, 감정의 흐름이 살아 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클래식 공연은 결코 과거의 유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어떤 장르보다 '현장성'이 핵심인 예술임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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